본문 바로가기
사진과 이야기

H군땅집 3

by merlin시현 2023. 4. 23.




멋진 집에는 제약이 있었다. 2년 월세 계약, 연장 불가능, 집주인의 짐 보관용이라 방 한 칸은 못 씀. 방 한 칸을 못 쓰는 건 아쉬웠으나 2년만 살고 떠나야 한다는 점은 매력적이었다. 곧 잃게 될 걸 아니까 흠뻑 들이마실 수 있겠어. 차 앞유리에 비처럼 톡 톡 내려 쌓이는 아카시아 꽃잎들처럼. 포도알 같은 둘째의 발가락처럼..

엄마 이 집으로 할래. 이 집이 좋아.
아이들도 나도 날듯이 집 구경을 마치고 돌아왔다.
더 이상 다른 집을 알아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비즈에게 연결받은 집주인과 소통을 시작했다.

계약을 앞두고 전남편에게 집 사진을 보여주었다. 드디어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됐네, 하는 목소리가 심상했다. 그러게, 로 답했다.

...

지금은 H군민이 된 지 두 달 차다. 이사오자마자 H군수 직인이 찍힌, 뒷면이 공란인 새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을 생각이었는데 아직이다. 군민이 된 감각을 천천히 만끽하고 있다.
일상은 이사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 다 함께 아침을 먹고 각자 하루를 보낼 곳으로, 학교로 어린이집으로 일터로 흩어진다. 피곤할 때는 비타민 C를 먹고 잠을 아홉 시간 정도 자길 이틀 하면 멀쩡해진다. 익숙한 요리 몇 가지를 돌려가며 만들어 먹고 가장 자주 사 먹는 건 빵이다. 둘째는 여전히 떡을 좋아하고 첫째는 늘 그렇듯 주는 대로 다 먹는다. 다 마른 빨래는 일주일에 한 번 개고 설거지는 하루 한 번 한다.

이제는 거기에 H군 땅집이 소스로 뿌려지는 것이다. 소스 하나만으로 전혀 다른 음식이 되는 매직을 안다. 취향에 맞는 것 단 하나가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이완시키는 힘을 가졌단 걸. 그거는 별거 아닌 게 아니다.
나는 꽃자리를 딛고 서 있다.

암튼 요새 좀.. 좋다.




'사진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 기사님 1  (1) 2023.05.06
가나다  (0) 2023.05.01
H군땅집 1  (0) 2023.04.08
스카이다이빙 거북 1  (2) 2023.04.01
엄마 내가 요리해줄게  (2) 2023.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