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진과 이야기

첫 출가 1

by merlin시현 2023. 3. 17.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필리핀으로 한 달간 어학연수를 다녀오게 되었다. 수원교구 대표쯤 되는 큰 성당에서 모집한 청소년 어학연수였다. 신부님께서 공항서부터 학생들을 인솔하시는데다 손수 영어를 가르치신다는 점, 신실하고 오가닉한 프로그램 수준 대비 비교적 저렴한 비용이라는 점 등등에 매료된 엄마의 권유로 참가하게 되었다.

스무 명 쯤 되는 중부지방 곳곳의 아이들이 공항에 한데 모였다. 나는 지금과 외모나 옷차림이 그닥 다르지 않아 노숙한 인상을 주는 애였다. 언니들이 다가와 나이를 묻더니 '미친 개삭았어' 하고는 멀어져 갔다. 동갑은 없고 다른 초등생들은 내가 보기엔 아기였다. 어색하게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비행기에 올랐다.

집을 떠나서 그렇게 오래 지내게 된 적은 처음이었다. 것도 해외다. 비행기가 바퀴를 접고 이륙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생각에 퍼뜩 압도되며 코가 시려왔지만 소리내 훌쩍일 수 있을 만큼 구슬프지도 용감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울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누군가 숨죽여 끅끅 울기 시작했다는 게 느껴졌다. 두리번거리니 제일 어린 열한 살 서연이였다. 젤 어린 애 운다는 소문이 금세 퍼지면서 기내에 동병상련의 물결이 일었다. 놀리거나 핀잔을 주는 애는 한 명도 없었다. 서연이는 울다가 웃었다. 누군가 간지럼을 태워서였다. 다행히 젖은 눈의 아이들이 착륙한 마닐라 공항 안의 공기는 포근하고 아늑했다.

뭐 공기야 한 달 내내 아늑했다. 따뜻한 나라이니 당연하다.
어학 연수 센터는 과연 좋았다. 느슨하게 짜여진 프로그램은 부담될 게 없었고 온갖 종의 새 소리에 아침 잠을 깨는 정취 또한 선물 같았다. 뿔테 안경을 쓴 민정 언니와 두런두런 둘만 얘기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여름 나라 시골 마을 소박하고 낮은 건물과 색이 바랜 농구 코트가 있는 야자수 정원과 함께 겨울 방학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되게 호사를 누리고 있구나, 하고 알았다. 여기까진 좋은데 생각을 한 번 꼬고야 말았다. 집에 가기 전까지 이 시간을 즐겁게 보낼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즐거울 의무를 진다는 것은.. 즐겁지 않지만 즐거운 척을 성심껏 하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느냐고 그 때의 내게 물어보고 싶지만 기억 속 나는 말이 없다.

'사진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 내가 요리해줄게  (2) 2023.04.01
첫 출가 2  (2) 2023.03.22
자기소개  (2) 2023.03.10
행운 1편  (1) 2022.02.07
토마토밥은 맛있어  (0) 2020.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