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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이야기

첫 출가 2

by merlin시현 2023. 3. 22.


그렇게 각을 잡고도 나름 지내졌다. 시간이 그냥저냥 흐르는 내내 여기 참 좋다.. 고 생각하지 않은 날은 없었지만 늘 피곤하고 어깨가 아팠다. 아침 징이 울리기 10분 전에 미리 일어나 씻었고, 빠른 걸음으로 총총 복도를 걸어다니며 수업을 듣고 산책하고 노래도 하고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모든 일정에 꼬박꼬박 참여했다. 귀국 전날엔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 편지를 쓰고 작은 과자를 함께 드렸다. 학생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알아서 그랬다. 앤소니 신부님은 그 편지를 받고 너무 감격하신 나머지 나를 들쳐안고 빙글빙글 도셨다. 다른 애들은 편지는커녕 할아버지인 앤소니 신부님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었어서 내가 대비되었던 모양이다. 허허허 웃음소리와 함께 빙글빙글 돌려지면서 난 너무 쪽팔렸다.
모두의 앞에서 돌려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부님은 편지를 낭독하셨다. 이건 거의 범생이 인증에다가 다른 애들을 은은히 멕이는 거나 다름없는........
민정 언니를 포함한 떨떠름한 표정들 앞에서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무사히 귀국한 나는 먹고 싶었던 참치 김밥을 먹고 잠을 많이 잤다. 한 달간 똥을 두 번만 누었는데 그렇다고 집에 오자마자 배를 뒤틀지는 않았다. 몸도 마음도 긴장을 푸는 데 시간이 걸렸다.

지금까지는 이 때를 그저 첫 출가였어서 고단했었던 것 같다고 이해해왔다. 근데 요새 들어 다시 떠올려보니 13살에도 나는 나다웠구나 싶다. 똥을 두 번 밖에 못 누고 그렇게도 뒷목이 뻣뻣했던 이유는 심플했다. 혼자 있을 시간이 너무 모자라서였다.
난 혼자 있는 시간을 매일 최대한 확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집에 혼자 있는 걸 가장 좋아하구..
그때는 물론이고 작년까지도 이걸 몰랐다. 아주 중요한 걸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아주 난데없는 상황에서도 유연하고 아무개나 같이 어울리고 아무 데서나 머리 대면 잠을 곧잘 자는 사람이 되고 싶기는 한데 지금은 좀 혼자 있어 보고.......
그 다음에 그런 사람 되든가 말든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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