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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이야기

단 하나의 음식

by merlin시현 2023. 5. 18.




언젠가 비즈가 내게 누룽지를 권하며 말했다. 저는 만약에 딱 한 가지 음식만 먹을 수 있다면 이걸 고를 것 같아요.
난 한 번도 누룽지를 친밀하게 여겨 본 적이 없는데 비즈에겐 그런 대접을 받는구나 싶어 잔잔하게 쇼킹했다. 그 후 누룽지를 무시하지 않게 되었다.

글쓰기 모임 글로리 3기 초반 명경님의 글 속에서도 수아는 말한다. 만약 꼭 하나만 먹어야 한다면 당근을 고를 것 같다고.........
당근을..!
그 후 당근을 홀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아무튼 누룽지와 당근에게는 심장이 뛰지 않는단 얘기다. 그리고 곰곰 생각해 봐도 난 그런 단 하나의 음식이 없는 듯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런 가정을 시작함과 동시에 아포칼립스적 무대가 머리속에서 연출된다. 괴롭고 고독한 나날이 이어질 것을 예감하며 벙커 안에 구비해 놓을 단 하나의 음식. 보존이 쉬워야 하며 영양 균형이 어느 정도는 맞아주어야 한다는 계산이 이어지면 뭐 사실 고를 게 없다. 재밌게 한참 상상에 빠져 있다가 지금 우리 집 냉장고 속에서 나를 기다리는 식재료를 상기하며 현실로 돌아온다. 단 하나의 음식 고르기는 늘 흐지부지, 끝을 보지 못했다.

이번 화요일엔 재가노인 도시락 반찬 중 하나로 두부부침을 만들어야 했다. 도톰하게 썰어낸 두부를 한 집당 4~5점을 주길 76집이니 한 350장을 부치면 됐다. 지글지글지글. 연수 이모와 함께 두부들을 노릇하게 부쳐내 차곡차곡 쟁반에 옮겨 담길 몇 시간 했다. 덥고 피곤했지만 다른 반찬 만들기보다 훨씬 기분이 가벼웠다. 참 맛있고 든든한 반찬이지. 두부는 참 좋단 말이야.. 생각하다가 무심코 말이 튀어나왔다. 저는 만약에 딱 하나만 먹을 수 있다면 두부 먹을 것 같아요.
맨날 먹어 봐라, 질리지 그것도. 하고 연수 이모는 회의적으로 대꾸하셨지만 난 놀라워서 맘이 벅찼다.

두부였다...!!

평소 난 콩으로 만든 것이면 다 좋아하긴 했다.
낫토, 후무스, 두유, 비지찌개, 콩밥, 유부는 참 입맛을 당기게 하는 것들이고 외식 메뉴로도 자주 손이 가곤 하지. 그냥 완두콩 삶아 먹는 것도 얼마나 맛있는지. 콩자반은 딱딱해서 싫지만 그래도 자꾸 손이 가긴 해. 출산 후에는 콩을 삶고 갈아서 콩물 만든 것을 매일매일 왕창 마셔 댔고 말이야..
그리고 두부.
두부는 만만하고도 맛있다. 순두부는 보드랍고, 연두부는 간식이고, 얼었다가 녹은 두부는 퍼들퍼들하고, 건두부는 꼬들하고, 따끈한 두부는 든든하고. 메인으로도 반찬으로도 어울리는 팔방미인이다.
그래. 단 하나의 음식을 고르라면 그냥 오리지널 판두부. 네모난 그 두부를 고르겠다.
두부와 함께라면 어디든 괜찮을 것 같다..

  두부 러브를 깨달은 그날부터 오늘까지 매일 두부를 먹고 있다(우연히 그렇게 됨). 그렇게 입에 엄청 황홀경을 주는 건 아니면서도 진심으로 자꾸 젓가락이 향하는 이 음식이 새삼 매력적이다. 끝내 결정하기로 한다.
우리 벙커엔 두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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