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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가 2 그렇게 각을 잡고도 나름 지내졌다. 시간이 그냥저냥 흐르는 내내 여기 참 좋다.. 고 생각하지 않은 날은 없었지만 늘 피곤하고 어깨가 아팠다. 아침 징이 울리기 10분 전에 미리 일어나 씻었고, 빠른 걸음으로 총총 복도를 걸어다니며 수업을 듣고 산책하고 노래도 하고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모든 일정에 꼬박꼬박 참여했다. 귀국 전날엔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 편지를 쓰고 작은 과자를 함께 드렸다. 학생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알아서 그랬다. 앤소니 신부님은 그 편지를 받고 너무 감격하신 나머지 나를 들쳐안고 빙글빙글 도셨다. 다른 애들은 편지는커녕 할아버지인 앤소니 신부님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었어서 내가 대비되었던 모양이다. 허허허 웃음소리와 함께 빙글빙글 돌려지면서 난 너무 쪽팔렸다. 모두의 앞에서 돌려졌기.. 2023. 3. 22.
첫 출가 1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필리핀으로 한 달간 어학연수를 다녀오게 되었다. 수원교구 대표쯤 되는 큰 성당에서 모집한 청소년 어학연수였다. 신부님께서 공항서부터 학생들을 인솔하시는데다 손수 영어를 가르치신다는 점, 신실하고 오가닉한 프로그램 수준 대비 비교적 저렴한 비용이라는 점 등등에 매료된 엄마의 권유로 참가하게 되었다. 스무 명 쯤 되는 중부지방 곳곳의 아이들이 공항에 한데 모였다. 나는 지금과 외모나 옷차림이 그닥 다르지 않아 노숙한 인상을 주는 애였다. 언니들이 다가와 나이를 묻더니 '미친 개삭았어' 하고는 멀어져 갔다. 동갑은 없고 다른 초등생들은 내가 보기엔 아기였다. 어색하게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비행기에 올랐다. 집을 떠나서 그렇게 오래 지내게 된 적은 처음이었다. 것도 해외다. 비행기가 .. 2023. 3. 17.
자기소개 저는 지금 햇볕이 내리쬐는 바닷가에서.. 등이 훤히 드러난 수영복 차림으로 따뜻한 모래 위에 성근 천 한 장 깔고 앉아서 차가운 수정과를 홀짝 홀짝 마시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이리 와서 앉으세요. 가래떡 드실래요?? 살얼음 낀 아이스티도 있어요. 맥주가 없어요. 운전해야 돼서.. 평일에 열심히 일하고.. 주말이라 여기 해변에 놀러 왔어요. 마침 전남편이 이번 주에는 애들하고 1박 보내겠다고 해서 번개같이 토스하고 홀홀단신으로다가.. (왔다이거죠) 머리 많이 길어서 파마를 좀 하고 싶었는데 이 기장에 숱이 많으니까 너무 예수님 같을까봐요. 어 담배 드릴까요? 제 가방에 있어요.. 라이터에 아까 모래 좀 들어가서 부싯돌이 좀 거치적거려요. 하다 보면 되긴 해요.. 너무 좋죠.. 2023. 3. 10.
행운 1편 안개가 촘촘한 아침시간, 애들과 함께 킥보드를 타고 공원을 누비는데 저 멀리 잔디밭에 주저앉은 사람이 보였다. 왜 저길 앉아 있나 해서 애들을 이끌고 그 쪽으로 갔다. 미동도 않고 두 다리 사이에 고개를 파묻은 그녀 모습에 내 마음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길래 저런 곳에서 울까. 이윽고 그녀가 있는 잔디밭 쪽에 다다랐다. 애들보고는 벤치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뭐.. 도와드릴까요? 네? 하고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엔 눈물이 없었다. 그냥 물음표만 가득했다. 아, 저기, 우시는 줄 알았어요. 아, 아니예요. 네잎클로버 찾느라고. 서로 어색하게 아아하하 웃었다. 나는 다시 애들에게로 돌아왔고 그녀도 시선을 땅에 두었다. 공원을 벗어나 다시 씽씽. 애들과 함께 킥보드를 타고 앞서거.. 2022. 2. 7.